ChatGPT (이하 “GPT”) 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검색 수단으로서의 1차원적인 기능 뿐 아니라 업무적으로 이메일을 쓰거나 학교 과제를 해주는 “대리인” 으로서의 역할도 꽤 만족스럽게 해내는 것 같다. 이번년도 5월에 시행된 Intelligent.com의 설문지에 따르면1223명의 대학생들 중 30%가 GPT를 사용해 과제를 낸 적이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46%는 과제를 위해 꽤 자주 GPT를 사용한다고 했다. GPT를 이용하여 얻은 과제의 결과 또한 평균 혹은 그 이상인 것을 고려 했을 때 적어도 “교육”분야 안에서GPT의 능력과 영역이 머지않아 인간을 대처 혹은 더 나아가 넘어선다고 하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닐수도 있다. (Ray Kurzweil의 the singularity이론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시기를 2045년 쯤으로 보고있다)2045년이 됐건 그 후가 됐던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압도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인공지능이 인간 자체를 대처 할 수 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리철학에서 자주 쓰이는 qualia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소위 인간은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가장 슬픈 생명체라고도 한다. 동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스스로가 태어나고 죽는걸 인지 ([self-]aware)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우리의 경험들을 주관적으로 혹은 “내것” 으로 만들어 준다. 이 인간의 인지능력을 통해 완성된 주관적인 “내” 경험들을 qualia라 한다. 예를 들면 내 앞 테이블에 노란 레몬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 레몬을 씹으면 매우 신 맛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눈물이 핑 돌 것이다. 혹은 초코렛을 입에 넣고 녹이면서 먹을때의 나의 행복한 기분, 혹은 아주 매운,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그날의 스트레스를 매운 라면과 함께 증발 시키고자 하는 모습과 같이 신맛, 달콤한 맛 그리고 매운맛을 느낄때 이 때의 기분이 qualia이다. 단순히 음식이 제공하는 맛을 넘어 그 맛과 연결된 나의 기분, 표정, 행동 등이 qualia 이다.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바로 그 경험을 하고 있는 주체자만이 가질수 있는 매우 특별한 특권. qualia는 그 경험의 자체이고 그 경험을 하기 위해 “인지” 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인공지능이 Shakespeare와 유사한 시를 쓰고 에세이를 대신 작성해주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공지능이 과연 qualia를 가질수 있을까? 시를 쓰는 동안에 주체자로서 여러가지의 생각, 고뇌, 상상 그리고 그것들로 파생되어 느끼는 슬픈, 우울한, 행복한 등의 감정. 주체자로서만 입장(access)이 가능한 특권. 학교 에세이 과제를 마감 전날밤에 Red Bull을 벗삼아서 초조하고,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한 단어, 두 단어 써내려가며,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서 마음을 다시잡고 또 한 단어, 두 단어 써내려가는 의지와 끈기. 어려운 수학문제를 앞에 두고 끼니를 거르면서 하루, 이틀 풀어봐도 답이 안 나오다 결국 마침내 정답을 찾았을때의 희열과 벅찬 기쁨. 인공지능은 이러한 qualia를 절대 가질수 없고, 인지 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지능인 것이다. 만들어진 부자연스러운 지능을 통해 인간의 일부분을 흉내 내려 하는것. 누군가는 인공지능이 qualia, 즉, 인간만이 느끼는 주관적인 기분을 느껴야 할 필요성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 특히 시,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과 같은 창작 업무는 지능만으로 우수한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창작은 인공지능이 습득하는 일련의 알고리즘을 넘어선 기쁨, 분노, 감동, 억울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융합되어 나올 수 있는 고도의 고된 업무이다. 이는 인공지능이 교육 분야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없는 한계이다.